아드리안
인류를 구원할 존재에서 폐기해야 할 키메라의 잔재가 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원래 같지 않았고 구원을 바라는 눈빛도, 외침도 예전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W.O.W를 선택한 것은 인류가 키메라보다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제 와서 동족을 죽여가며 인류에게 이용당하던 패라고 생각하는 건 괴로웠다. 근원이 큰물이었더라도 우리는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인류였다. 인간이어야 했다. 연구소에서 만났던 다정한 얼굴이나, 도피 생활에 스쳤던 어린 생명과도 같은 인간…. 어떤 생명이든 동류의 편에 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도… 인류에 의해 만나게 된 인연이었으니까.
릴리
키메라와 W.O.W.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였지만 릴리에게 소중한 것은 이미 하나로 좁혀진 뒤였다. 아드리안, 그리고 아드리안과 함께 영위할 둘만의 생활. 마음 같아서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이대로 지내고 싶었지만, 워커가 새롭게 필요해진 이들이 도망자를 대하는 태도는 또 집요한 방향으로 달라졌기에 릴리는 선택을 했다. 선택의 기준은 한 가지였다. ‘어느 쪽이 우리를 배신했을 때 더욱 만만한가.’
릴리는 아드리안 외에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기로 했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또 저들 편한 대로 우리를 이용하고 배신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인류를 모두 몰아내고 키메라만 남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키메라가 우리를 배신했을 때의 상황은 겪어보지 않았다. 문명을 잃은 자연에서는 아드리안과 즐길 것도 적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은 충분히 겪어봤고, 또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위해도 쉽사리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드리안이 아직 인류로서, 인류의 손을 들어주길 원했으니까.
그렇게 릴리는 다시 W.O.W. 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인류애는 티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만만한 쪽에 붙었을 뿐. 인류애가 없으니 이전과 같은 태도로 임무에 임하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리하지 않고, 저와 아드리안의 페널티가 견디지 못하게 치솟지 않을 정도로만. 공격해오는 키메라를 적당히 몰아내고, 또 적당히 빠진다. 적으로서 만난 워커와의 전투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유순히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아드리안이 더 인류를 지키길 바라면 기꺼이 동행했으나 제 능력은 아드리안이 최대한 다치지 않는 데에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W.O.W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릴리는 늘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것이 너희가 끝끝내 만들어낸 구원자란다.